황해도 무형문화재 3호 <놀량사거리> 보유자 한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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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 기자 2019-04-22

[강원경제신문] 김철우 기자 = 이북5도위원회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 연속 취재. 이번 호에는 황해도 무형문화재 3<놀량사거리> 보유자 한명순 명창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명가수로 불리다 국악의 길로 들어서 서도소리로는 최초로 대통령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이북무형문화재연합회 회장을 맡아 무형문화재 보존에 힘을 보태고 있다.

 

▲ 황해도 무형문화재 3호 <놀량사거리> 보유자 한명순     © 김철우 기자

 

한명순 선생의 어린 시절

 

한명순 선생은 1960년 충남 청양군의 부농(富農)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청주한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에서 늦둥이였던 한명순 선생의 아버지는 노랫가락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시골 한량이었다. 그러다가 마을에 금광이 터지며 광산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된다. 힘든 농사일보다는 많은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테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명순 선생의 집안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벌어 놓은 돈의 상당 부분을 노름으로 탕진하고, 한명순 선생이 아홉 살에 세상을 뜨고 만다. 결국, 열대여섯 마지기가 아버지가 남긴 전부였고, 한명순 선생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궁핍의 연속이었다.

 

국악의 길에 들어서다

 

한명순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유명한 명가수였다. 일곱 살 때부터 <목포의 눈물> 같은 유행가를 불렀고, <청춘가><매화타령> 같은 민요도 불렀다. 아이가 청승맞게 노래를 잘하니 동네 사람들도 신기했는지 어린 명순만 보면 노래를 시켰다. 노래를 부르면 어린 명순은 감자나 고구마 등 먹을거리를 받기도 했는데, 모두 가난하던 시절에 이런 재미로 더 노래를 불렀다. 광산이 전성기일 무렵 명절 때면 노래자랑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오빠들의 손에 이끌려 참가한 대회에서 어린 명순은 거의 1등을 차지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명순은 학업을 지속할 수 없어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홀로 가수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수가 되는 길을 알지 못했던 어린 명순에게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명순은 몇 번만 들으면 가사와 곡조를 외울 수 있었고, 어떤 노래도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태생적으로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가수가 되겠다고 작곡가를 찾아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매월 당시 돈 5만 원으로 요구해 명순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300만 원 정도의 거액이었다. 

 

어린 명순이 대중가수가 아닌 국악의 길로 접어든 것은 실로 우연하게 찾아왔다. 19759, KBS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민요백일장이란 공개방송에 참가하게 되었다. 청양에서 어렵게 차비를 마련하여 남산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100여 명이 예선을 거쳐 7, 8명 정도가 본선에 올랐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안비취 명창은 한명순의 참가곡 <매화타령>을 듣고 소리는 잘했는데 가사 한 부분을 실수하여 2등을 주었다고 말한다. 결국, 한명순은 장원에 이은 2등으로 인기상을 받았다. 이때 그녀를 눈여겨 본 사람이 바로 김정연 명창이었다

 

▲     © 김철우 기자

 

김정연 명창과의 만남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이 방송에 찬조 출연했다가 한명순을 보게 된 것이다. 절절하게 후계자가 될 제목 감을 찾고 있던 김정연 명창에게는 운명 같은 발견이었다. 대회가 끝나자 김정연은 한명순에게 부모님 허락을 받고 연락하라며 명함을 준다. 고향에 돌아온 명순은 어머니와 오빠들과 상의했다. 청주한씨 집안에서 기생이 나올 수 없다고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큰오빠는 인간문화재를 목표로 열심히 하라며 허락했다. 어려운 상황의 집안에서 입 하나를 더는 일이었기에 가장 노릇을 하던 오빠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린 명순은 서도소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김정연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며칠 후 사전 연락도 없이 김정연은 당시 귀했던 브리샤 승용차를 타고 직접 청양으로 제자를 데리러 간 것이다. 서울에서 인간문화재가 자가용을 타고 명순을 데리러 왔다는 소식은 고향인 대봉리를 들썩이게 했다. 김정연은 명순의 집에서 딱 물 한 잔 마시고 짐을 싸게 했다. 그렇게 명순은 서울 마포구 창천동에 있는 스승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197510월의 일이었다.

 

본격적인 소리의 길

 

스승의 집에 들어와 내제자가 된 명순이었지만, 노래는 배우지 못했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소리 교습을 하였지만, 명순을 참가시키지 않았다. 빨래며 버선 다리기, 동정 달기, 연탄 갈기 등의 집안일만 시켰다. 몸종과 같은 신세였다. 명순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묵묵히 견뎠다.

석 달쯤 지나서였다. 교습시간에 <긴아리>라는 서도소리를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소리를 듣고 명순은 입으로 흥얼거리며 다녔다. 명순은 석 달 만에 어깨너머로 <긴아리>를 거의 익혔던 것이다. 이를 유심히 보던 김정연은 방으로 명순을 불러 노래를 시켰다. 명순은 이미 여러 번 들은 것이어서 무리 없이 <긴아리>를 부르자 놀란 것은 바로 김정연이었다. 재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부터 김정연은 명순에게 본격적으로 소리를 가르쳤다. 노래만이 아니라 소리꾼으로서의 예의범절과 한자를 공부하게도 했다. 그렇게 3년을 스승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듯 배워나갔다.

 

19824월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1회 국악대공연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무대에 선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국악 명인들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매방, 김소희, 박동진, 김월하, 안비취 등 당대 문화재급 출연진과 서도소리는 오복녀와 오복녀의 제자 김광숙, 김정연과 김정연의 제자 한명순이 출연했는데, 한명순에게는 파격적인 무대였다. 그만큼 김정연은 제자인 한명순을 사랑하고 인정했던 것이다.

 

▲ 놀량사거리 공연    © 김철우 기자

 

서도소리로 대통령상 수상

 

1986년 한명순은 전수장학생을 끝내고 서도소리 이수자가 되었지만, 이듬해 스승은 갑작스럽게 타계한다. 당뇨와 갑상샘암이 원인이었다. 스승이 타계하자 스승의 큰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승이 없는 명순에게 국악계의 인심도 확연하게 달라졌다. 서도소리를 포기하자고 마음먹고 6, 7년을 보내자 명순은 서서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1993년 국악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나가 <초한가>를 불러 3등을 했다. 매번 1등만 하던 명순에게 오기가 생긴 것이다. 이를 악물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5, 6. 1999경기국악제에서 서도좌창 <공명가>를 불러 서도소리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다.

한명순은 이에 그치지 않고 스승과 함께 여러 번 공연했던 서도입창 <놀량사거리>200910황해도 무형문화재 제3호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한명순은 문화재 보유자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흔히 여자들에게 소리의 전성기는 50대라고 한다. 어리면 소리의 맛을 모르고 아이가 들면 목이 가라앉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담기 위해 음반 제작을 하기로 마음먹고 일 년 반에 걸쳐 녹음 작업을 진행했다. 20149월 출시된 한명순의 서도소리-소리의 길<놀량사거리>, <서도시창과 서도민요>, <서도좌창>, <서도송서>, <경기민요>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신을 발굴해준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한명순 소리 인생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 무형문화재 보유자 한명순     © 김철우 기자

 

<놀량사거리>란 무엇인가

 

<놀량사거리><선소리산타령>, <서도입창>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서서 부르니까 선소리 또는 입창이며, 유람 삼아 떠도는 내용이어서 산타령이다. ‘놀량놀다에서 파생된 말로, ‘놀량패(또는 사당패)’노는 패거리, 전문적으로 소리를 하며 떠도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이 주로 부르는 소리 또한 <놀량>이라고 했으며, 놀량패의 가장 대중적인 레퍼토리가 바로 <놀량사거리>였다.

사당패는 조선조 세조 이후 절을 근거지로 삼아 비승비속(非僧非俗) 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는 사찰의 홍보와 재정을 담당하다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속화되어 유랑 연예인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이 집단은 겨울에는 사찰 아래 사하촌(寺下村)을 형성하면서 거주하다가 봄이 되면 전국으로 공연을 떠났다.

<놀량사거리> 노랫말은 여러 노래의 가사와 자신들의 희로애락을 버무린 것이었다. , 그들이 사찰에서 나와 전국을 유람하면서 먹고, 자고, 돈을 벌며, 다른 노래를 배우고, 춤을 춘 연예활동의 종합기록이었다.

<놀량사거리>19세기 중반 이후 사당패가 몰락하며 지역패에 전승되었다. 그 지역패들 가운데 그들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유지되며 21세기까지 살아남은 것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기반을 둔 <놀량사거리>와 서울을 근거지로 둔 <경기산타령>이 그것이다.

이처럼 <놀량사거리>는 우리 민속 음악의 전개와 변모양상을 살펴보는데 매우 귀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놀량사거리 연구(Human & Books), 한명순의 서도소리-소리의 길 음반해설집 참조)

 

 

한명순 프로필

 

1999년 경기국악제 대통령상 수상

()서도소리보존회 상임이사

()한국국악협회 서도소리분과 위원장 

이북무형문화재연합회 회장

기사입력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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